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칠천량 해전 (문단 편집) === 7월 14일: 무의미한 추격으로 체력을 낭비하다 === 7월 11일, 원균이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그 날로 제 성질을 못 이기고 '''한산도에서 전군을 출정시켰다'''. 김완이 무리수라고 간하였지만 이를 묵살하고 진행했다. 7월 12-13일, 3차 출정과 마찬가지로 칠천량, 옥포에서 1박을 했다. 7월 14일 점심경, 부산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한다. 그러나 조선 수군보다 속도가 빠른 일본 수군이 살살 거리를 벌리며 대결을 회피하였고, 원균은 이들을 홧김에 추격하였으나, '''전선의 운용이 어려운 노군들의 탈진 지점에 이르러서야 복귀를 결정'''한다. 7월 14일 저녁경,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 도착한다. 물을 싣기 위해 400명을 보냈는데, 가덕도에 있던 [[타치바나 나오츠구]]의 군의 기습을 받자, 원균은 '''그 병사들을 전부 가덕도에다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이는 2월 13일 이순신이 가덕도에서 초동이 죽자 극대노하여 공성전을 벌이고 요시라의 사과까지 받아낸 것과 너무나도 상반된다. 다만 2월엔 5백명 남짓만 있었지만, 이 시점엔 일본 수군이 정식으로 있는 상황이었다. 7월 14일 밤경, 조선 수군은 거제도 북쪽 영등포에 정박하려 한다. 하지만 해소실기에 따르면 '적과 대치하며 하릴없이 기각지세를 이루었다' 즉 정박하기에 만만치 않은 일본군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이에 조선 수군은 또다시 노를 저어 칠천량으로 이동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